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천국 불신지옥 (문단 편집) ==== 해설 ==== 말했듯이, 공의회는 그 자체나 자체 문장 몇개만으로 '이것이 가톨릭 구원관 가르침의 전부다' 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기존 가톨릭의 교리에 입각해서 이해되고 다뤄져야 한다. 이를테면 공의회에는 '탓 없는' 착한 비신자에 대한 구원은 말하고 있지만, '탓이 있는' 비신자[* 대표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알고 있어도 믿지 않는 자와 가톨릭에서 타 종교/교파(개신교 포함)로 개종한 배교자.]에 대한 구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가톨릭 교리에서는 탓이 있는 비신자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이상 '[[지옥]]행'이 확실하다고 본다. [[공의회]] 참석 주교와 성직자들도 모두 가톨릭 신학에 박식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모두 알고 있었고, 때문에 언급을 안한 것이다. 또한 무신론자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무신론자들이 지옥가면 그렇게 만든 그리스도인도 지옥감. 그러니 니들은 불신자들한테 복음에 대해선 입도 뻥끗 하지마라"는 식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가 복음을 전할 때는 모범적인 행실로 본을 보임과 동시에 충실한 교리지식과 함께 선교하라"는, 가톨릭의 전통적인 선교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단 전체적인 추세로는, 비신자의 구원 문제에 대해 개신교에 비해 조건부 한정으로 너그럽게 보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라 정리될 수 있긴 하다. 개신교 주요 교파들과는 달리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직접적으로 내세우며 비신앙인들에게 강조하지는 않고 있다. 또한 공의회에서 확실히 밝혀두듯이, 기독교 신앙을 자기 탓 없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 교리는 개신교의 해석인 복음을 듣지 못한 경우, 로마서에 나오는 이방인은 양심으로 판단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탓 없이 복음을 듣지 못한 부류의 예로 천주교 전래 이전의 한반도 사람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채 하느님이 은총으로 주신 자연적인 선행과 양심을 따르는 선한 삶을 살았던 경우에는) 구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 그렇다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가르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톨릭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 >846 교부들이 자주 반복했던 이 단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이해할 때, 이 말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성사|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__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__ > >847 이 단언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 >84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만 아시는 길로, 자기의 탓 없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실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복음화의 필요성과 동시에 그 거룩한 권리를 가진다.” >---- >[[가톨릭]] 교리서 846~848항 구원 문제에 대한 정확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음 해설 내용의 출처는 20세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정평있는 교리해설서로 꼽히던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의 <상해천주교요리> 상권 254p ~ 258p의 내용을 다수 참고하였다.[* 여담으로, 이 교리서는 윤형중 신부 본인이 20세기 초 신학생 시절에 배운 교리내용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인 1956년~1959년에 걸쳐 집필/출판된 서적이다. 이는 가톨릭의 구원관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변경된게 아니라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1. [[신학/가톨릭|가톨릭 신학]]에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방법상의 필요(Necessitas medii)이고, 다른 하나는 '명령상의 필요(Necessitas praecepti)이다. 방법상의 필요는 그것이 없다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며, 명령상의 필요는 해당 사항을 알고도 일부러(고의적으로) 게을리하면 죄가 되고 구원받을 수 없게 되나, 불가항력적(도저히 자기 탓으로가 아닌) 무지나 불가능으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만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건 아닌 요소를 의미한다. 2. 전자인 방법상의 필요의 예시를 들자면, 구원에 필요한 주님의 '은총'을 들 수 있고, 명령상의 필요의 예시를 들자면 [[영성체]], [[미사]] 참례 같은 것을 예로 들수 있다. 3. 그리고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물리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있고, 마음으로도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 이를 흔히 육신적 교회, 영적 교회라고도 구분하는데, 육신적 교회(물리적으로 소속된 교회)란 [[교황]]과 가톨릭 [[주교]]들의 지도를 따르는 가톨릭 신자들의 외견적이고 외적인 집합체를 의미한다. 영적 교회(마음으로 소속된 교회)란 신앙과 [[야훼|하느님]]의 은총을 가지고 있는, 즉 [[대죄]]가 없는 영혼들의 비가시적이고(눈에 보이지 않고) 내적인 집합체를 의미한다. 4. 구원을 위하여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 '물리적으로' 소속되는 것은 명령상 필요에 들어가고, '마음으로 가톨릭교회에 소속'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방법상 필요에 들어간다. 따라서 불가항력적 무지의 상태에서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가톨릭교회의 일원에 물리적으로 소속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외적으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고 가톨릭의 계명을 지키지만, 속으로 불신에 가득 차 있거나 특정 교리를 거부하거나, 마음속 죄나 몰래 짓는 죄에 빠져있다면, 마음으로 가톨릭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못하므로 겉으로 가톨릭 신자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 5. 불가항력적 무지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의 경우, 첫째 수단인 물리적인 가톨릭교회의 소속을 할 수 없으니 가톨릭교회에 적어도 '마음으로라도' 속하는 것이 방법상 필요하다. 여기서 마음으로라도 속한다는 의미는, 어떤 것이 진정한 종교인지, 또는 진정한 기독교 종파인지 모르지만, 모든 일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교를 알기만 하면 곧 거기에 입교할 만한 정신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마음으로라도' 속한 사람들에 들어간다. 6. 그러나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흔히 무시하곤 하는 대단히 중요한 점이 있다. 불가항력적 무지는 절대로[* 예를 들어 "아 그래? 그럼 난 불가항력적 무지 상태니까 그럼 [[가톨릭|천주교]] 안 믿어도 구원받지?" 식의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말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상태부터가 이미 불가항력적인 무지가 아니다. 천주교를 믿을 생각이 안 든다면, 5번에서 말했듯 끊임없이 기도(혹은 그에 준하는 마음의 준비)를 계속하면서 은총을 청하고 이미 알려진 천주교의 교리를 지속적으로 힘껏 연구할 의무가 있다. 이를 게을리한다면 구원받을 가능성조차도 받을 수 없다.] "고의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해도 구원 가능"하다는 식의 교리가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가톨릭 교리를 잘 모른다는 식으로 흔히 표현되는 신앙적 무지가 가항력적인지, 불가항력적인지의 범위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지, __개개인의 기준대로, 자기 멋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__는 것이다. 6-1. 교회에서 가르치는 불가항력적인 무지의 대표적 예시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동 저서, 255p.] - 가톨릭교회의 존재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 - 가톨릭교회의 존재는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 - 부지런히 [[세례성사]] 준비를 하다가(예비신자) 갑자기 죽게 되는 사람들[* 현행 가톨릭 교회법에서도 예비신자가 죽으면 사실상의 신자로 간주하여 장례 [[미사]]를 치뤄준다. 예비신자야말로 후술할 '화세'를 받았을 개연성이 가장 높은 부류이기 때문.] - 해당 설명과 별도로, 본인이 열정적으로 가톨릭을 믿고 세례받고 싶었는데 외적 장애로 인하여 못 믿은 사람은 화세(열망의 세례, 하단참조)로 구원받을 수 있다. 7. 또한 이 불가항력적 무지는 '선의'의 불가항력적 무지여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6번 항목에서 이미 말했지만 정말로 진실되게 몰라서 믿지 않은 것이여야 되고, 알면서도 영적 진리 탐구를 게을리 하거나 고의적으로 무지의 상태를 자처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천주교와 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단히 해박하고 종교 전반에 관해 알 것도 다 알면서 천주교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자유사상]]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들이나, 천주교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 등은 명백히 악의적 무지의 상태에 있기에,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7-1. 설령 선의의 불가항력적 무지로 구원받을 수 있다 하여도, 이 구원은 절대로 해당 사람이 믿는 타종교/또는 무종교적 상태가 해당 사람을 구원한 게 아니라, 오직 그 개인의 선의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바다를 건널 만큼 튼튼한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은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파선될지라도 몇몇 사람들은 헤엄쳐 살아날 수 있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일에 흔히 비유된다. 또한 비가톨릭 신자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학적 기준의 [[대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이 [[대죄]]의 기준은 '이 행위가 대죄임을 고의적으로 알고 있으며, 자기 의지로 지어야 하는 죄악'이다. 비신자 상당수는 천주교 기준의 대죄에 대해 지식이 없을 것이기에 상당수가 불가항력적 무지로 감면은 되긴 하겠으나, 대죄에는 교리적 의무가 아닌 비신자에게도 익숙한 일반적 도덕률 상당수도 범주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 모든 기독교파들의 대표적 윤리관으로 비신자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혼전순결]], 성적 정숙이나 혹은 [[동성애]]행위, [[간통]]하지 말 것, [[폭행]]이나 [[절도죄|절도]], [[살인]]하지 말 것, 각종 국법상 [[범죄]]를 짓지 말 것 등이다. 이를 어기고 회개하지 않았다면 가톨릭 기준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이 점은 신자나 비신자나 평등하며, [[대죄]]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8. 또한 가시적으로, 물리적으로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었다 가톨릭 교회를 고의적으로 떠난 배교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어나면서부터 가톨릭교회 밖의 종파(예를 들면 지금의 [[개신교]], [[정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이단자라고 부르지 않으며, 고의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버린 사람들이 이단자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고의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버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 9. 마지막으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의 무오류한 세계 공의회 중 하나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특정 신자가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부족해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합리적 근거를 바라면서 가톨릭 신앙 가지기를 미루거나 등한시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신앙에 대한 법령> 제 6조. "만일 누가 신앙인들이 처한 조건과 아직 유일한 참신앙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처한 조건이 동일해서,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신빙성과 진실성에 대한 과학적 입증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자기들의 동의를 중지시킨 채 (가톨릭)교회의 교도권을 통해 받아들인 신앙을 의심할 정당할 이유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따라서 신앙을 가질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 만으로 가톨릭을 거부하는 것[* 어린 시절 기독교인이었다 성년이 되어서 [[반기독교]]인이 된 케이스이자, 수학자,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엄밀히는 러셀은 가톨릭은 아니었지만) 그는 생전에 자신이 죽고 난 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만난다면 어떻게 말하겠냐는 질문에 "하느님, 당신을 믿기엔 근거가 없었다고요!"라고 변명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은 선의의 무지에 들어갈 수 없다(=악의의 무지이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 말하자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된다'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배우자이며, 인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우선적으로 비신자를 배제함을 원칙으로 하나,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 어느 시대든 모든 비신자를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 비신자들의 상태, 조건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또 7-1에서도 서술되었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제우스]]나 [[오딘]]의 경쟁자가 아니라 온 세상의 유일신, 유일한 절대자이며, 그리스도교는 [[불교]]나 [[도교]]의 경쟁 종교가 아니라 '유일한 참 신앙'이기 때문에 즉 [[불교]] 신자이든 [[힌두교]] 신자이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즉 힌두교나 불교 등 비아브라함계 종교 그 자체에 구원의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주장을 한다면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빠진 것이므로 가톨릭의 가르침과 즉각 어긋나게 된다) 단지 개개인 단위에서는 '불가항력적 무지와 개인의 영혼구원을 향한 의지를 전제로' 구원의 가능성까진 배제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역사적으로 [[고성소]]라는 신학적 개념도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제시된 고성소는 2가지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전해지기 이전(그러니까 복음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이들)의 의로운 사람들이 편하게 머무는 구약의 고성소, 그리고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나 영아들이 가는 유아 림보가 있었다. 고성소 자체는 교리는 아니었지만, 거의 교리에 준할 정도로 신학자나 가톨릭 대중에게 익숙한 생각이었다. 이중 유아 림보설은 현재는 세례받지 못한 아기가 불상사로 죽더라도 결국 그건 자기 탓이 아니므로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단, 고성소설을 말할 때 유의할 점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같이 가톨릭 세계관을 다룬 창작물에서의 고성소에는 선량하게 살았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불신자들도 머물고 있다는 식으로 나와있기도 한데, 이런 식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이 가미된 창작일 뿐 중세에도 현재도 가톨릭 교리가 아니다. 2016년 기준으로, 가톨릭 교리에서 고성소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 의인들만을 대상으로 기능했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과 승천 이후 비어 있는 고성소뿐이다. 신학자들과 [[사제(성직자)|사제]]들 사이에서는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이러한 의견들 역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공의회라는 틀 내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교리 외적으로는, 일단 가톨릭이 견지하는 기본적인 기치는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대체로 존중하고 잘 활용하는 편이며, 온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서로 다른 신앙, 믿음체계, 사고방식 등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에 맞춰 풀이하여 개종자를 낼 것인가를 2천년 이상 고민해온 양반들이라 최근 몇 세기 동안 본진인 서구권에서는 교세가 크게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아무래도 개신교보다 수백 년 앞서 온 세계에 선교를 해온 전문가들이다. 이러다 보니, 가톨릭의 사제들이 전교의 과정에서 깨달은 최초의 난점이자 딜레마가 바로 앞서 거론된, 그럼 우리 조상님들은 기독교라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자신이 전혀 접해보지도 못했고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것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다 지옥에 떨어졌다는 말이냐?며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전교지역의 주민들과 마주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상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고 세상 모든 것을 스스로의 이치에 따라 행하시는 분이 하느님인데, 그렇다면 서양에서 멀리 떨어진 동양이나, 다른 오지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모두 하느님의 뜻으로 각자 사명을 띄고 세상에 태어난 것인데, 기독교와 복음이 전해질래야 전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수백, 수천년 동안을 태어나 살다 죽었다면, 하느님은 별 이유도, 잘못도 없이 처음부터 지옥에 떨어질 운명을 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대량으로 만들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이전 시대 사람들을 한정으로 [[고성소]] 개념을 유지해오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문화가 서양과는 어떠한 접점도 없이 완전히 다른 곳에서 전도는 심각한 거부감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9세기에 들어와 전 세계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슬슬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여러가지로 획기적인 새로운 시각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단, 여기서 오해하면 안되는 중대한 사실이 있는데, 자유주의 신학 자체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명백한 이단 사상으로 단죄되었다. 또한 이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시대 변화에 따라 교리를 바꾸려는 주장을 [[파문]]으로 단죄한다고 규정했으며, 지금도 공식적으로 자유주의를 부정한다. 마치 가톨릭 교회가 시대 변화, 혹은 비신자들의 불만에 따라 교리를 변경했다는 뉘앙스의 서술은 [[오류]]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한 [[바오로 6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든지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중략).. 상대적인 세속적 사고방식에 대해 관대하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던지, 이전보다 더 쉽고 덜 철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형태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1965년 발언).] 가톨릭 교회의 경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불변했으나, 각종 헌장, 교서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한 과거 교황들의 견해들, 세계공의회의 문헌들에는 해당 교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놀랍도록 합리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까지도 종교와 믿음, 구원에 대하여 많은 가톨릭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 23세]]가 시작하고 [[바오로 6세]]가 마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다. 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내용이 발표되었을 때, 일부 신자들은 [[바오로 6세]]를 "빨갱이 교황"이라며 반발할 정도로 거부감을 드러냈는데, 그만큼 공의회의 내용은 일부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이다.[* 사실 이런 의견들 자체는, 절대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의 태도라 할 수 없다. 비록 신앙과 도덕에 관한 공의회의 무류성이 공식적으로 선언된건 2차 바티칸 공의회 들어서이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세계공의회는 결코 '좀 큰 회의' 정도로 취급되지 않았다. 공의회에 대한 폄하는 명백하게 비전통적이고, 비정통적이고, 비가톨릭적인 의견이다. 세속 국가에 비유하자면,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이 헌법을 부정한다고 생각해보자.] 우선 [[바오로 6세]]는 [[이슬람]]에서 늘 주장해온 바 "우리들이 모시는 알라는 너희 기독교들의 하느님과 같은 분이다"라는 주장을 인정했다. 둘째로,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던 사람이라고 해도 그 스스로의 선행과 바른 삶이 곧 복음을 일부 반영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고, 상기한 조건에 따라 조건부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은총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사목헌장> 22장에서의 이 선언 역시 상당히 놀라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이치가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공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발언이 무게는 기존의 교리상 "오로지 [[예수]]를 통한 구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부정하는 주장은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단죄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① 그리스도와 교회는 일치하여 있기 때문에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교회와 결합하여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다(교회헌장 14). > >② 그리스도께서 가톨릭 교회를 세우신 것을 알면서 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거나 거기서 나가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종교적 무관심주의를 용인할 수 없다(교회 헌장 14). > >③ “교회 안에 완전히 결합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제도와 교회 안에 마련된 구원의 수단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보이는 교회조직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이니, 즉 신앙고백과 성사와 교계제도와의 통교(通交)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교회헌장 14). > >④ “그러나 교회에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교회헌장 14). > >⑤ 자기 탓없이 교회에 완전히 결합하지 못한 자 중에 예비신자들은 그 신앙고백과 소망으로써 이미 교회의 자녀이다(교회헌장 14). 그러므로 완전하게 교회에 일치한 자만이 구원된다는 피니의 주장은 배척되어야 한다(검사성성 훈령). > >⑥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동일한 신앙고백, 동일한 성사 동일한 교계 종속의 3조건 중 그 어느 하나나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한 그리스도 교도들은 갈라진 형제라고 보며 그들에게도 불가피한 무지를 전제로 하여 구원이 가능하다(교회헌장 15). > >⑦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여도 참 하느님을 예배하는 유태교인이나 회교도도 교회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구원이 가능하다(교회헌장 16). > >⑧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참으로 참 하느님을 모르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양심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도 구원은 가능하다(교회헌장 10). > >물론 이 경우에도 하느님의 은총의 부여를 전제로 하고 가능한 것이다. 이상의 조항들은 성서의 가르침으로 뒷받침된다. 성서는 단순한 무지를 책하지 않고 고의적인 거부를 단죄한다. “나를 배척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요한 12:48).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5: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야고 2: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신부들 역시도 구체적 뉘앙스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위의 설명과는 대체로 일치하는 이야기를 한다.[* 간혹 "우리 본당 [[신부님]]은 안 그러시던데?"라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으나, 질문을 정확하게 하면 대체로 공의회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내의 틀에서 답변하려고 한다.] >1260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른다고 해도, 진리를 찾고 자신이 아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세례의 필요성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세례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 > >1261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의 경우, 그들을 위한 장례 예식에서 하듯이 교회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마르 10,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이 거룩한 세례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교회의 호소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 >---- >[[가톨릭]] 교리서 1260, 1261항 위의 교리문답은 보수적 성향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절 나온 것이다. 이 경우에는교리서의 이 말 역시도, 공의회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으며, 일부 근본주의자들보다는 당연히 훨씬 유연하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누누히 강조했으나, 구원에 대한 이런 조건부 구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교리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로 계승되어 온 로마 교회의 교인들로서, 교회 바깥의 구원은 없다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교회뿐이며, 교회로 들어오지 않는 자는 절망 속에서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br][br]그러나, 우리는 또한, 참된 신앙에 대해 가망 없이 무지한 자들 또한 주의 눈에는 죄인들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 개개인의 성품, 인종, 국가, 지식, 그러한 차이들로 인해 어느 정도의 무지함까지가 용납될 수 있는지를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가 도대체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 >교황 [[비오 9세]], 대중연설, 1854. 12. 9.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에 대해 가망이 없을 정도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의 법칙을 조신하게 지키며,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이 내려주신 양심에 따라 살고, 하느님을 따를 기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성령에 인도되어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시며, 사람의 마음 속을 살피시며, 그의 생각, 태도, 의도를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br][br]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느님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죄를 저지르게 된 어느 누구도 영원히 단죄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 >교황 [[비오 9세]], 이탈리아 주교들을 향한 연설, 1863. 8. 10. 다만, 앞에서도 계속 설명한 것처럼 여기서의 참된 신앙에 대해 '가망 없이 무지한 자'들의 범주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가톨릭 신앙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경우, 특정 행위가 가톨릭의 [[대죄]]임을 알면서도 이를 계속 범하는 경우, 그리고 가톨릭과 종교적 진리에 대한 탐구의 노력을 등한시하고 게을리하는 경우는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또 비오 9세는 일찍이 1847년 12월17일 추기경 담화에서 자신의 해당 교리해설이나/가톨릭 교리를 악용하여 고의적인 비가톨릭 신자(고의적 무신론자, 불신자, 이교도)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극도로 분노를 표시하였다. >"우리 시대에 가톨릭 신앙의 원수들은 그들의 모든 극악 무도한 의견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동일 선상에 놓아 그 둘을 혼동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점점 더 종교무관심주의라는 불경한 사고방식을 퍼뜨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그에 대해 말하려니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자들은 우리도 그들처럼(가톨릭 교회 밖의 고의적 불신자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 말했다고 우리를 중상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모든 인류에게 너무나 자애로운 나머지 교회의 자녀들만이 아니라 아무리 교회의 일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라 할지라도 동일하게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사악한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아연실색하여 우리에게 저질러진 이 전례없는 잔학한 불의에 대해 혐오(염오)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 > 1847.12.17 교황 [[비오 9세]]. 가톨릭 교리해설에서도 이를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성경은) 그러나 자기 탓 없이의 범주에 고의적으로 단순한 무지를 책하지 않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고의적인 거부를 단죄한다. “나를 배척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요한 12:48).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5: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야고 2: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출처 : 마리아사랑넷, 가톨릭사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항목][* 참고로 이 구절은 개신교의 이신칭의 교리를 비판하는 성경적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교황이 등장함에 따라 (가톨릭의 근본적인 교리는 바꿀 권한은 당연히 없지만) 사목적 태도에 있어서 가톨릭의 방향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지역별, 국가별, 문화별로 서로 처한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신토미즘(신 토마스 아퀴나스주의)의 발달 등 자체적 역사전개를 거치며 가톨릭의 수장은 확실한 공식적인 언사를 통해 여러 차례 위와 같은 해석을 공포하였으며, 이 덕분에 오늘날 확실하게 개신교보다는 넓은 가능성의 영역을 열어놓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http://web.pbc.co.kr/CMS/onmedia/programe.php?cid=324530&wr_id=128&code=5161|이러한]][* 해당 신부는 [[천주교 원주교구]] 태장동본당 주임사제인 박용식(시몬) 신부인데, 해당 영상이 나가고 난 뒤에 보수적인 신자들의 비판이 많았다. 분명히 가톨릭 교리에서는 비신자의 구원에 대해 비교적 엄격한 조건을 달고 있고, 본인도 신학교에서 이를 배웠음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비신자도 구원안하는 하느님은 하느님도 아니라는, 무신론자나 할 법한 오해를 살 발언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명심하자. 가톨릭 사제는 가톨릭의 교리를 따라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ju0gbQG-FsA|영상들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r1eZdYN96ig|보듯이]] 분명 가톨릭 신학자들과 사제들, 그리고 신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들과 강론들을 보면, 모두 하나같이 공의회라는 '교의적 고백'에서는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간혹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부정적으로 보네 어쩌네 하는 [[카더라]]가 돌지만, 전 교황은 공의회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경계할 뿐, 공의회 자체의 의견에 태클을 건 적은 없다. [[https://www.lifesitenews.com/news/pope-emeritus-benedict-says-church-is-now-facing-a-two-sided-deep-crisis|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의가 바뀌었다고 잘못 알려지면서 선교 열정을 감소시켰다는 인터뷰]][* 기사 출처는 LIFESITE NEWS.][* [[가톨릭]]에 비해 교리가 많이 유연한 [[성공회]]조차도 (종교)다원주의적 가치관은 단언코 경계한다.] 역시도 공의회 선언 자체에 대한 태클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우왕. 공의회의 선언이 있으니, 성당 안 나와도 아무 문제 없겠네"라는 오해들을 바로잡는 인터뷰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